[성유 축성 미사] 복음 전파는 즐거워야 하며 오만해서는 안됩니다.


교황이 사제들에게: 세상에 복음의 기쁨을 전하십시오.

교회는 주님 만찬 저녁 미사(Coena Domini)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13일 오후 프로시노네(Frosinone) 주에 위치한 팔리아노 (Paliano) 교도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교황은 몇 명의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손수 발 씻김 예식을 주례했다. 오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관습에 따라 성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중에, 로마교구 사제들은 사제 서약 갱신을 했으며, 한 해 동안 성사 집행에 필요한 병자 성유, 예비 신자 성유, 그리고 축성 성유(크리스마)를 축성했다.  

교황은 강론 중에 루카복음을 인용하며 격려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냈다.”(루카 4,18)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주님께서 기쁜 소식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모든 것은 또한 우리 사제들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죄의 상태에서 용서의 기름을 받고, 사명을 위한 축성 성유로 도유되어 다른 이들에게 성유를 바르는 것은 복음적 기쁨의 즐거움입니다. 예수님처럼, 사제들은 자신의 전 존재로, (복음) 선포의 기쁨을 전합니다. 강론은 가능한 짧게 하고, 자신의 기도 시간에 자신에게 감동을 준 하느님 말씀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복음 선포자들처럼, 사제들은 자신의 전 존재를 통해서 (복음) 선포의 기쁨을 전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제들은 - (사제인) 우리 모두가 체험한 것처럼 - 기쁨을 담아 전하는, 작지만 특별한 이들입니다. 이 특별함은 작은 한 걸음을 더 내딛고 버려진 땅에 자비가 넘쳐흐르게 하는 사람의 특별함입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의 시간과 날들을 정하고 실행하기를 결정하는 사람의 특별함입니다. 애정 어린 포용으로 자신의 시간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 놓는 사람의 특별함 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이 확신했다. “기쁜 소식은 단순하게 ‘복음’을 ‘좋은 소식’이나 ‘좋은 새 소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안에 다른 모든 것을 요약하는 복음의 기쁨입니다. 모든 것을 요약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은 복음의 귀한 보석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명입니다.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0항)을 체험한 사람은 이것을 알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기름 부음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먼저, 마리아의 태중에서 성령께서 이루신 예수님의 ‘위대한 사제직으로 기름 부음 받으심’ 입니다. 그날, 기쁜 주님 탄생 예고는 동정 마리아로 하여금 성모찬송(Magnificat)을 노래하게 했고, 그 배필인 요셉의 마음을 침묵으로 가득 채웠으며, 요한이 자신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기뻐 뛰놀게 했습니다”.

교황은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가십니다. 그곳의 작은 회당에서 성령의 기쁨은 기름 부음을 새롭게 합니다.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리시고,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시며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시편 45,8 참조). 기쁜 소식 입니다. 오직 한 말씀 – 복음 - 은 선포하는 행동 안에서 즐겁고 자비로운 진리로 변합니다. 그 누구도 복음의 다음 세 가지를 분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첫째,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둘째, 모든 죄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복음의 자비입니다. 셋째, 깊고 확고한 복음의 기쁨입니다. 진리와 자비와 기쁨은 함께 합니다. 기쁜 소식의 진리는, 책 안에 쓰여져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삶 안에서 완전하게 실행되지 않는 추상적 진리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의 자비는, 죄인이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밀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한 걸음 더 내 디딜 수 있도록 함께 해주지 못하고, 그 자신의 비참함 속에 버려 두는, 하나의 거짓된 연민이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지 않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기쁨”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37항)은 가난하고 작은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보는 예수님의 기쁨(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5항)이기에, 아주 개인적인 기쁨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슬프거나 미지근할 수 없습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했다. “복음의 기쁨에 대해 말할 때 이제는 복수로 쓰겠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문화 안의 모든 사람에게, 모든 시대 안에서 성령께서 알려 주시고자 하는 방법대로, 그것들은 다양하고 다를 것이기 때문에 복수로 쓰겠습니다. 복음의 기쁨들은 특별한 기쁨들입니다. 당신 메시지의 새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말씀 하신 것처럼, 새 자루에 담아야 합니다.

교황은 “기쁜 소식을 상하지 않게 잘 보관하고, 풍성하게 가득 채울 수 있는 새 자루의 세 가지 표징을” 소개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기쁜 소식의 첫번째 표징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 등장하는 돌로 된 물독 입니다(요한 2,6 참조). 특별한 면에서, 동정 성모 마리아 그 자체이시며 전부 이신, 완전한 물독이 투영됩니다. 복음서는 ‘그들이 물독 마다 가득 채웠다’(요한 2,7)고 전합니다. 일꾼들 중에 한 명이, 물 한 바가지를 더 채우라는 말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충분한지를 보려고, 마리아를 쳐다 보았을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마리아는 전파력이 있는 충만함의 새로운 물독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모 마리아 없이 우리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기쁨에 넘치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찬양 노래를 부르시는 여종이시며”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86항), 준비된 분이시며, 생명의 말씀을 순결한 태중에 잉태했을 때 바로 사촌인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봉사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전파력 있는 충만함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그 유혹은 바로 가장자리까지 넘쳐흐르도록 채우는 용기를 내지 않는 것이며, 다른 이들의 기쁨에 동화하지 않으려는 소심함입니다. 그런 것들은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주기”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항)때문입니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기쁜 소식의 두 번째 표징은 사마리아 여인이 한 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머리에 이고 온 물동이와 나무로 만든 물 뜨는 바가지 (요한 4,5-30 참조)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잘 표현합니다. 구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구체성 입니다. 생명의 물의 샘이신 주님께서는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실 수 있는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물동이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서 주님의 목마름을 채워 줍니다. 또한 더더욱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목마름을 채워 줍니다. 자비로 넘쳐흐르는 사마리아 여인의 영혼의 물독을 휘저으면서, 성령께서는, 주님께서 자신들과 머무르기를 청하는 그 작은 마을 사람들 안에 은총을 부어 넣어 주셨습니다. 이 구체성이 내재된 새 물독을 주님께서는 “사마리아적” 영혼, 즉 콜카타의 마더 테레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녀를 부르셨고, 그녀에게 “나는 목마르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작은 이여 오너라, 가난한 이들의 누추한 집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나의 빛이여 오너라. 그들이 나를 알지 못해서 나를 원하지 않으니, 그래서 나 혼자 갈 수 없으니 그들에게 나를 데려가 다오”. 그녀는, 실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미소와 자신의 손으로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나름의 방법으로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 했습니다. 손으로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방법은 환자들과 실망에 빠진 이들을 향한 사제들의 애정입니다. 사제들은 애정과 구체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기쁜 소식의 세 번째 표징은 상처 입은 주님 마음의 커다란 물독입니다. 자신에게 모두를 끌어 들이시는 겸손하고 온순하고 가난한 완전함입니다. 아주 가난한 이들에게 큰 기쁨을 선포한다는 것은 모욕까지도 감수한 겸손하고 예의 있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주님께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구체성과 겸손과 애정입니다. 그래야만 복음화가 즐거울 것입니다. 복음화는 오만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완전함은 강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살이 되고, 애정이 되고, 아이가 되고, 인간이 되고, 십자가에서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진리” (요한 16,13)를 이야기하시고 가르쳐 주시며, 한 모금이 되어 마셔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매 순간 우리의 적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 지 알려주시며(마태 10,19 참조), 그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시도를 알려주십니다. 이 온유한 온전함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죄인들을 새롭게 하며, 악마로부터 억압받는 이들이 한숨 돌리게 합니다”.

교황은 강론을 마치면서 이같이 말했다. “친애하는 신부님들, 이 세 개의 새로운 물독을 묵상하며, 이 물독에서 물을 마시면서, 성모마리아께서 자신의 전 존재와, 사마리아 여인의 구체성이 내재된 선포와, 성령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 난 마음에서 끊임없이 솟아나게 하고 부어 주신 온유한 온전함으로 전해주신 기쁜 소식이 여러분 안에서 충만한 전파력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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